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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 프랑스 엄마들이 우월한 이유

05.15.2012, 가족, by .

By PAMELA DRUCKERMAN


아이가 18개월 되었을 때 남편과 나는 딸을 데리고 잠깐 여름휴가를 가기로 했다.

우리는 살고 있던(나는 미국인이고 그는 영국인이다) 파리에서
열차로 몇 시간 떨어진 해안가 마을을 선택하고는 유아용 침대가 딸린 호텔방을 예약했다.
당시 우리에게는 딸 빈이 하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당시, 힘들어봐야 얼마나 힘들겠어 라고 생각했었다.





Emmanuel Fradin for The Wall Str

France, Paris, February 2, 2012. Author Pamela Druckerman poses with her kids inside her apartment.

호텔에서 조식을 해결했지만
옛 항구 근처의 작은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점심과 저녁을 먹어야 했다.
곧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아기를 데리고 하루에 두 번 외식을 하는 일이
얼마나 지옥 같은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빈은 잠깐 음식에 관심을 갖더니 몇 분 후 소금통을 엎지르고 설탕종이를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의자에서 일어나게 해달라고 조르더니 레스토랑을 휘젓고 다니며
심지어 위험천만하게도 부두까지 뛰쳐나갔다.


빨리 식사를 끝내자는 것이 전략이었다.
앉으면서 주문을 했고 빵을 서둘러 가져다 주고,
에피타이저와 메인 코스를 한꺼번에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이 생선 몇 입 먹는 동안
나는 빈이 웨이터에게 쫓겨나거나 바닷가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했고
다시 바꾸어 남편이 애를 살피고 내가 식사를 했다.
우리는 찢어진 냅킨과 테이블 주변의 떨어진 식용 오징어 등에 대해 사과의 뜻으로 많은 팁을 남겼다.


몇 번의 레스토랑에서 끔찍한 식사 경험 후
나는 주변의 프랑스 가족들은 우리 같은 고통을 겪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하게도 마치 그들은 휴가 중인 것 마냥 보였다.
프랑스 아기들은 높은 의자에 기꺼이 앉아 있었고 음식을 차분히 기다리고
생선과, 심지어는 야채까지 먹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징징거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테이블 주변에 쓰레기도 없었다.



당시 나는 프랑스에 산지 몇 년 정도 되었지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 부모들의 육아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단순히 식사 시간만 차이 나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갑자기 많은 질문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내가 거의 출근 도장을 찍을만큼 수많은 시간을 보냈던
프랑스 놀이터에서 왜 한번도 아이들이(우리 아이 빼고) 짜증을 부리는 것을 못 본 것일까?
왜 내 프랑스 친구들은 아이들이 뭔가를 달라고 졸라 결국 서둘러 휴대폰을 끊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일가?
왜 그들의 거실은 우리집처럼 인디언 천막과 장난감 부엌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프랑스의 부모들은 조용히 그리고 하나같이
모두 가족의 삶에 있어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 곧 분명해졌다.

우리 집에 방문한 미국인 가정의 부모들은 보통 아이들의 싸움을 말리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주방을 돌아다니는 걸음마 아기들을 돌보거나 레고 마을을 짓기 위해 마루에 주저 앉곤 했다.

반대로 프랑스 친구들이 방문 하면 성인들은 커피를 마시고 아이들은 자기네들끼리 즐겁게 논다.


해변에서의 주말 휴가가 끝날 즈음 나는 프랑스 부모들이 무엇을 다르게 하는지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왜 프랑스 아이들은 음식을 던지지 않았을까? 왜 부모들은 소리지르지 않았을까?
나도 행동을 바꾸면 내 아이에게서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엄마로서의 절실함 때문이었는지 지난 몇 년간 나는 프랑스 육아를 연구했다.
그리고 지금 빈은 6살, 쌍둥이는 3살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사실 프랑스 부모들도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정말 효과적인 육아 비결을 갖고 있다.


프린스턴 대학 경제학자들의 2009년 연구를 발견했을 때 처음으로 뭔가 가능성을 느꼈다.

이 연구에서 오하이오 콜롬버스 주의 엄마와 프랑스 렌의 엄마의 육아 경험 비교를 통해
연구자들은 미국 엄마들은 아이들을 다루는 일이
 프랑스 엄마들이 느끼는 것 보다 2배 이상 불유쾌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동 연구자들은 다른 연구에서는 텍사스의 일하는 엄마들의 경우
심지어 집안일이 육아보다 낫다고까지 말했다.


나는 분명 프랑스 옹호적인 편견을 앓고 있는 사람은 아니니 안심하라.
그 반대다. 여기서 사는 것을 좋아하는지조차 모르겠다.
아이들이 자라서 교만한 파리지엔느가 되기를 원치 않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미국 육아의 현재 문제를 확실히 두드러지게 보이게 만든다.
중산층 프랑스 부모들은 (부유층이나 빈곤층에 대해서 알아보지 않았다)
내게도 친숙한 가치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자연을 보여주고 책을 많이 읽어주는데 열성이었으며
아이들을 테니스 레슨, 미술 수업, 체험 과학 박물관 등에 데려갔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들은 너무 강박적이 되지 않으면서 가족 일에 참여해왔다.
그들은 심지어 좋은 부모들조차 늘 아이들을 위해 배려하는 것은 아니며
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에게 있어, 저녁은 부모를 위한 시간이다”라고 한 파리지엔느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딸이 원한다면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성인들의 시간이다.”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이 활발하기를 원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다.
일부 미국 아기들이 중국어 가정교사를 두고 글 깨우치기 전 교육을 받는 반면
프랑스 아이들은 혼자서 아장 아장 걸어 다닌다.


중산층 미국인들에게 육아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닐 것이다.
문제적인 육아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대해많은 노력이 있어왔다:
과잉육아(overparenting), 광적육아(hyperparenting), 헬리콥터 육아(helicopter parenting),
내가 개인적으로가장 좋아하는 과보호육아(Kindergarchy) 등이 있다.
부모들 스스로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혹독한 미국 부모의 육아 방법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


물론 프랑스는 육아를 보다 매력적이고 스트레스가 적도록 만들어 주는
온갖 종류의 공공 서비스를 다 갖추고 있다.

부모는 유치원 무상교육, 무상의료보험, 그리고 미래 아이들 학자금 저축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매달 양육비를 받는다. 양육비는 통장으로 바로 송금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공 서비스가 두 나라의 육아 차이를 모두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인들은 아이 양육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틀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프랑스 부모들에게 자녀들을 어떻게 훈육(discipline)하냐고 물었다.
그들이 내 말을 알아듣는데 조금 걸렸다. “아 어떻게 교육하냐는 거죠?”그들이 물었다.
나는 곧 그들에게 훈육이란 벌을 다루는 협소하고 거의 사용하지 않는 개념임을 알게 되었다.
반면 “교육”(학교와는 상관 없는 것)은 그들이 항상 하는 하는 모든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교육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단순한 행동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만난 프랑스 아이들이 2~3개월만 되도 밤새 깨지 않고 자는 이유이다.
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아이가 울자 마자 바로 달래지 않고 아기들이 다시 잠에 들도록 내버려 둔다.
그래서 왜 프랑스 아이들이 레스토랑에서 의젓하게 앉아 있는가도 설명된다.
미국 아이들처럼 하루 종일 먹기보다는 식사시간까지 기다린다.
(프랑스 아이들은 매번 하루 3번 식사하고 간식은 4시에 먹는다.)

어느 토요일 나는 30대 중반의 노동 변호사인 델핀 포셔를 방문했다.
그녀는 파리 동쪽 변두리에서 가족과 살고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녀의 남편은 거실에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고
1살의 오반은 근처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3살이 폴린은 식탁 테이블에 앉아 컵케익 반죽을 포장지에 털썩하고 떨어뜨리는 일에 몰입해 있었다.
반죽을 먹어 보고 싶은 유혹을 이겨낸 것 같았다.


델핀은 아이들에게 인내심을 구체적으로 가르친 적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 가족의 일상 생활은 즐거움을 참고 기다리는 것을 지속적으로 연습하는 것 같았다.
델핀은 때로 폴린에게 사탕을 사준다고 했다. (봉봉은 대부분의 빵집에 진열되어 있다).
그러나 폴린은 그날의 간식 시간 전에는 절대로 사탕을 허락하지 않았다.
설사 간식 시간까지 몇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폴린이 우리의 대화를 방해하려고 할 때면,
델핀은 “얘야, 2분만 기다리렴. 지금 이야기 중이잖니”라고 말했다.
매우 부드럽지만 확고했다.
나는 델핀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말하는지와
아이가 자신의 말에 순응할지에 대해서 얼마나 확신하는지에 대해 놀랐다.
델핀은 또한 아이들에게 혼자 노는 법과 같은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혼자서도 행복한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그녀의 아들 오반을 언급하며 말했다.


이는 미국 엄마들 보다는 프랑스 엄마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
프랑스 엄마들은 이를 명확히 육성하려고 한다.
2004년 대학교육을 받은 미국과 프랑스의 엄마들의 육아 신념에 대한 연구에서
미국 엄마들은 아이들이 혼자 놀도록 장려하는 것에 대해 중간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프랑스 엄마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이후 아이들이 즐거움을 참고 기다릴 수 있게 하는 학습의 세계적 권위자인 월터 미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당시 80세의 콜롬비아 대학 교수인 미쉘씨는 그의 오랜 여자친구가 있는 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나와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미쉘은 1960년대 말 스탠포드에 있을 때 “마쉬멜로우 테스트”를 고안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 테스트에서 4세 혹은 5세 아이들을 탁자 위에 마쉬멜로우가 놓여 있는 방에 데리고 들어갔다.
실험자들은 아이들에게 잠시 후 돌아올테니,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이 마쉬멜로우에 손대지 않으면,
마쉬멜로우 2개를 상으로 받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아이가 마쉬멜로우를 먹게 되면 아이는 마쉬멜로우를 더 이상 먹을 수 없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30초 정도만 기다렸다.
3명 중 1명만이 실험자가 자리를 뜬 15분을 온전히 참고 있었다.
연구자들이 발견한 것은 잘 참는 아이들에게는 (마쉬멜로우에서)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요령이 있었다.


이어 1980년대 중반 미쉘과 그의 동료들은 잘 참는 자들은 집중과 추론력이 있었고
스트레스 하에서 통제를 잃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프랑스의 중산층 부모들이 하듯이 이러한 인내를 가르치는 것이
정말 아이들을 보다 차분하고 강하게 만드는가?
아마도 원하는 것을 즉각 얻게 되는 중산층 미국 아이들이 스트레스 하에서
종종 무너지는 이유가 이를 통해 어느 정도 설명되지 않을까?


원래 빈 출신인 미쉘씨는 프랑스 아이들에게 마쉬멜로우 시험을 해 본적은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를 오랫동안 관찰한 사람으로써 그는 프랑스와 미국 아이들의 차이에 놀란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그는 “분명 아이들의 자가 통제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물론 미국 부모들은 아이들이 인내심을 갖기를 원한다.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식탁을 차리고, 피아노를 연습하라고 독려한다. 그러나 프랑스 부모들처럼 우리는 헌신적으로 인내심을 연마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아이들이 화를 내는 면에서만 아이들이 참고 인내하는지를 보는 경향이 있다.
미국인들의 시각에서는, 운이 좋으면 인내심 있는 아이를 얻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Nicolas Héron for The Wall Street Journal

Delphine Porcher with daughter Pauline. The family’s daily rituals are an apprenticeship in learning to wait.


프랑스 부모들과 보육자들은
우리가 이 중요한 능력에 대해 그토록 자유 방임주의인지 믿기 어려워할 것이다.
내가 파리의 한 저녁 식사 초대에서 이 주제를 언급하자 프랑스인 집주인은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1년간 살았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미국인 부부와 친구가 되었고 산타바바라로 주말 여행을 같이 가기로 했다.
서로의 아이들과 함께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들은 7세에서 15세 가량 되었다.
수년이 지나서도 그들은 미국 아이들이 성인의 대화를 어떻게 끊어 놓았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해진 식사 시간이 없었다.
미국 아이들은 원할 때면 언제든지 냉장고로 가서 먹을 것을 꺼내 먹었다.
프랑스 부부에게 미국 아이들은 자기 마음대로인 것 같았다.


“우리가 놀라고 신경 썼던 부분은
부모들이 절대로 “안 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라고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아이들은 “자기 마음대로”였다고 그의 아내가 덧붙였다.


한참 후 대부분의 미국 아이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표현에
자기 n’importe quoi 즉 “무엇이든지” 혹은 “자기 마음대로 “라는 단어가 포함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것은 미국 아이들에게 정해진 경계가 없다는 것이며
그들의 부모는 권위가 부족하고 무슨 일이든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부모들이 종종 이야기하는 프랑스의 카드레 즉 틀이라는 이상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카드레는 아이들이 특정 사항에 대해 확고한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틀이다.
그리고 부모들은 이를 엄격히 이행한다.
그러나 카드레 안에는, 프랑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많은 자유와 자율을 위임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권위는 프랑스인들의 육아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아마도 습득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내가 만난 많은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에 대해 편하고 차분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며 나는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그들의 아이들은 실제 부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
프랑스 아이들은 지속적으로, 휙 가버리거나 말대꾸하거나 끈질기게 조른다던가 하지 않는다.



어느 일요일 아침 공원에서
내 이웃인 프레드리케는 당시 2살인 아들 리오와 내가 씨름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리오는 아주 재빨랐고 따라서 내가 리오와 공원에 갔을 때 나 역시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는 놀이터 근처의 입구만 보려면 나가려 했다.

프레드리케는 최근 너무 예쁜 빨간 머리의 3살 여아를 러시아에서 입양했다.
같이 나갔을 때 그녀는 엄마가 된지 3개월 째였다.
그러나 프랑스인라는 것 때문에 그녀는 이미 나보다는 권위에 대해 완전히 다른 비젼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이 가능한 것이며 무엇이 정도에 벗어나는가에 대해 확연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프레드리케와 나는 모래 상자의 주변에 앉아서 이야기 하려 했다.
그러나 리오가 계속해서 모래상자 근처에 있었던 문 밖으로 계속 뛰어나가려 했고,
매번 나는 아이를 쫓아가야 했고, 나무랬고, 또 아이를 끌고 오고, 아이는 소리를 질러댔다.
처음에 프레드리케는 조용이 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만약 내가 리오를 계속 쫓아다니면, 우리는 앉아서 몇 분 이야기하는
이 작은 기쁨을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공손하게 말했다.


“맞아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프레드리케는 내가 리오에 대해 보다 엄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음 속으로는 오후 내내 리오를 쫓아 다니는 일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는 정도에 벗어나는 일이었다.


나는 20분간 리오를 나무랐다고 말했다.
프레드리케는 미소지었다. 그녀는 내가 “안돼”를 강하게 표현해야 하고
정말 그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말했다.
리오가 또 입구 밖으로 뛰어가려 하자 나는 여느 때보다 더 강하게 “안돼”라고 말했다.
어쨌든 아이는 나가 버렸다. 나는 따라가서 아이를 다시 끌어왔다.
“봤죠?”라고 나는 말했다.
“가능하지 않아요”


프레드리케는 다시 웃으며 나에게 소리지르기 보다는 보다 확신을 가지고 말하라고 했다.
나는 아이가 겁먹게 될까 두려웠다. “걱정 마세요”, 프레드리케가 나를 격려하며 말했다.


리오는 다음에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안돼”라는 대답에 보다 확신이 실려 있음을 느꼈다.
소리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확신이 있었다. 4번째 시도에서 나는 마침내 확신에 가득 찼다.
리오는 입구 쪽으로 접근했지만 – 기적같이 – 그 문을 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돌아보더니 나를 조심스럽게 보았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쳐다보았다.


10분 후 리오는 나가려는 노력을 완전히 멈추었다.
그는 문에 대해서 잊어버린 것 같았고 다른 아이들과 모래 상자에서 놀았다.
곧 프레드리케와 나는 다리를 쭉 펴고 담소를 나누었다.
나는 리오가 갑자기 나를 귄위있는 사람으로 보게 된 것에 놀랐다.


“봤죠?” 프레드리케가 말했지만, 잘난체 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목소리 톤을 달리해서 그래요” 그녀는 리오가 그로 인해 충격을 받지는 않았음을 지적했다.
그 순간 그리고 아마도 처음으로 리오가 진짜 프랑스 아이 같아 보였다.


이 기사의 영어원문 보기

[출처]Korea Real Tim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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